프리덤 앤 라이프 (Freedom And Life) - 북한의 핵노선 변화,한미 동맹 숙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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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세사필담
흐릿한 ‘민족’ 유대는 결국 폐기되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2.10.04 01:04
업데이트 2022.10.04 01:30
북한의 공격 본능이 드디어 절정에 달했다. 지난달 8일 법제화된 ‘선제 핵 공격’, ‘건드리지 않아도 쏘겠다’는 조항을 명문화했다. 북한 주민의 경제난에 쓰던 수법과는 강도와 심도가 다르다. 유사시 김정은은 물론 인민무력부도 핵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이는 1993년부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던 미국과 한국의 대응전략이 총체적으로 실패했고, 이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했음을 뜻한다.
북한 핵은 누가봐도 통제불가임이 입증됐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을 말리느라 어정쩡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북한에 대응해 지난 18일 미국 국무부는 ‘발사의 왼편’(left of launch)이란 권한을 한국에 내줬는데 ‘적국의 비(非)핵공격에도 선제타격을 감행한다’는 북한의 결단에 비추면 무력하기 짝이 없다. 미사일을 소총으로 막는 격이다. 한국은 지그재그였다. 보수정권은 ‘비핵화’를 공염불처럼 외쳐왔고, 진보는 동정심에 격해 그냥 눈을 감았다. 설마 남쪽을 겨냥하랴 싶었던 거다. 남한이 이렇게 엇박자를 내는 동안 북한의 대남정책은 일관성이 있었다. 핵보유국! 남한의 보수에겐 욕설을 해대고, 진보에겐 생떼를 부리면서 핵을 만들었다. 1993년 이래 세 차례의 핵위기를 겪으면서도 민족 정서에 기댔던 게 역사적 오판이었다.
평양 당국 선제 핵공격 법제화
민족주의 환상을 걷어낼 계기
역사공동체에서 혈연관계 소멸
핵동맹과 전술핵 논의 대두될 것
대북 강경파 존 볼턴(전 미국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말대로, 싱가포르·하노이·DMZ 회담 모두가 김정은의 시간벌기 연극이었고, 미국과 한국은 약간의 ‘정상적 사고’와 ‘민족정서’에 기대를 걸었던 순진한 관객이었을 뿐이다. 통일지상과 친북을 고수하는 586세대 주사파 정치인에게는 친제반민(親帝反民)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우리 민족끼리!’는 결국 헛소리가 됐다.
민족의 사용설명서가 남북한이 달랐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안다. 남한은 동포애 환상을 바탕에 깔았고, 북한은 체제유지를 치장하는 위장전술이었다. 민족통일 개념이 ‘자유대한’과 ‘적화’(赤化)로 오래전 갈라졌음을 남북한이 명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는데 이번의 핵법제화는 막연한 민족 정서가 공포의 불균형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음을 일깨웠다.
한반도 민족개념의 흐름은 세계와 역방향이다. 세계화 시대에 주요국들은 ‘탈(脫)민족’으로 방향을 틀어 평화공존과 번영을 구가하고자 했다. 미국과 EU가 그런 조류를 주도했다. 그러나 EU 회원국의 이해충돌이 점차 거세지고 미중 헤게모니전이 격화되면서 탈민족에서 ‘자(自)민족주의’로 돌아섰다. 유럽의 주요국들은 일단 민족공동체 내로 퇴각하는 추세고, 중국은 아예 중화민족의 일대일로를 거침없이 닦았다. 북한은 거꾸로다. 핵무력 앞에 민족은 없다. 올해만 이십 차례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다. 평양당국이 보유한 핵탄두 70여 개가 서울과 뉴욕을 겨냥하고 있고 유사시 군수뇌부도 단추를 누룰 수 있단다. 한국은 핵탄두 앞에 적대적 타인종, 타민족 집단이 됐다.
사정이 이럴진대 한반도에 흐릿한 구름처럼 남아 있는 민족 정서가 이제는 수명을 다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류학적으로 민족은 혈연, 관습, 언어공동체다. 여기에 문화, 역사, 정치체제 같은 공통경험이 가해지면 민족개념은 풍화되지 않는 돌덩어리로 변한다. 북한이 평양 외곽 주몽의 동명왕릉에 백두혈통을 새겨넣은 것은 심각한 역사 훼철에 해당하지만 남한과는 고구려를 공유하는 기억공동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기억과 DNA가 같다고 민족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시량(柴糧) 걱정과 생활고를 오래 같이 겪어야 하고, 천연재해든 외국의 압력이든 동일한 공간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한반도 7500만 민족은 두 개의 단단한 국가로 나뉘어 74년을 살았다. 전란의 비애를 씻는 한 맺힌 세월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구성의 최대요인인 국가가 외려 민족개념을 손상하는 특수한 사례다. 정치체제, 관습, 문화는 경악할만큼 달라졌다. 두려운 것은 혈연의 소멸이다. 70년대만 해도 실향민은 1000만명에 달했다. 민족 혈연이 유효할 때 태어난 해방둥이 1945년생이 20년 후에 모두 몰(沒)한다고 보면 남북한 실제 혈연관계는 일단 단절된다.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에 심기일전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면 안 될 것도 없지만, 올해 38세 김정은이 핵을 들고 협박할 시간이 적어도 20년 넘게 남았다고 보면 그런 상상의 공간이 만들어질지 의문이다. 반인륜적 핵무력 앞에서 민족의 사용설명서는 낡은 교범이 됐다.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이를 계기로 미몽을 깨야 한다. 한반도 민족주의에서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 보수는 ‘비핵화’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명제임을 자인하고, 진보는 ‘우리 민족끼리’에 설복당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필요한 날을 위해 민족주의의 불씨를 아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북한의 보모(保母) 중국이 향후 20년간 강화해갈 글로벌 영향력 내에서 북한 핵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기에 한미 핵동맹과 전술핵 배치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으로 필요해졌다. 우리도 진정 핵무장 쪽으로 가야 하는가?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