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도
국민 통합, 누구나 똑같이 ‘법의 지배’ 받을 때 가능하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3/19/6JY557XYRFF7JNOGTRK3LRCHC4/
입력 2022.03.19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분열 조장하다 이제 “국민통합” 외쳐...통합과 반통합 세력으로 갈라치는 수법?
분열 정치로 전 국민을 두 진영으로 갈라치기 해온 정치인들이 느닷없이 “국민 통합”을 외치고 나섰다. “적폐청산”의 깃발을 날카로운 창처럼 흔들며 “국민 분열”을 조장하다가 스스로 적폐가 되자 대뜸 “국민 통합”의 구호를 견고한 방패처럼 내밀고 있다. 국민을 또다시 “통합 세력”과 “반(反)통합 세력”으로 양분하려는 속셈인가?
다원화된 현대국가에서 “국민 통합”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장 효율적인 통합의 방도는 무엇일까? 걸출한 지도자가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전 국민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면 통합이 이뤄질 수 있을까? 공교육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공적 매체로 민족의식을 선양하면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을까? 과거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화해”의 캠페인을 벌이면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대동(大同)을 실현할까?
그 모든 방법이 일시적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은 빈부 격차, 지역 갈등, 종교 마찰, 인종 차별, 신념 충돌, 세대 차이, 젠더 문제 등으로 이미 사분오열되어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 사회를 돌보면, 수많은 정치가, 종교인, 학자, 활동가들이 모두 나서서 찢기고 구겨진 “사회의 직물(social fabric)”을 깁고 잇고 다림질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분열의 골은 갈수록 더 깊어지는 추세다. 두 갈래 정치(bifurcated politics), 분열 정치(divisive politics), 쟁론 정치(contentious politics), 부족 정치(tribal politics) 등등 “타협 불가의 권력 투쟁” “화해 불능의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한탄하는 학계의 신조어가 넘쳐난다.
결국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국민 통합”의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확립하는 길밖에 없다. 법이 공정하지 않으면 국민은 분열된다. 반면 법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 사분오열된 국민이라 해도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적 질서를 존중한다. 아무리 싫은 반대편의 정부라 해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무정부의 혼란보다는 덜 위태롭기 때문이다.
“국민 분열”을 조장해 온 정치인들은 “국민 통합”을 외칠 자격이 없다. 진정 “국민 통합”을 바란다면 쉬운 말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법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 특히 권력자의 직권남용, 행정가의 정책 실패, 공직자의 부정부패, 정치인의 비위(非違) 행위는 추상같은 법의 잣대로 냉철하게 수사하고 엄정(嚴正)하게 처벌해야만 한다.
법치의 시스템에 따라 권력형 비리를 일소하는 작업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다. 동서고금 어디를 봐도 “법의 지배” 없는 “국민 통합”이란 사상누각일 뿐이다. 기껏해야 정치 선동에 의한 여론몰이이거나 독재정권의 대민(對民) 동원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문혁 이후 갈가리 찢어진 인민을 재결속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행했던 발란(撥亂, 혼란 수습)과 반정(反正, 정상 회복)의 정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분열 정치의 대가 마오쩌둥...대중을 인민과 인민의 적으로 양분
마오쩌둥은 분열 정치의 마스터였다.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매국면마다 비슷한 패턴의 전술을 구사했다. 계급철폐, 인민해방,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 등 고원한 이상을 제시한 후, 대중을 인민과 적인(敵人, 인민의 적), 혁명분자와 반혁명분자, 사회주의자와 수정주의자 등으로 양분하는 수법이었다.
문화혁명(1966-1976) “10년의 대동란(大動亂)” 동안 마오쩌둥의 분열 정치는 절정에 달했다. 마오쩌둥이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외치며 “수정주의 당권파를 제거하라!” 명령하자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열광적으로 일어나 집단린치를 가하고, “계급천민(階級賤民)”을 학살하고, 전국을 들쑤시며 증오와 파괴의 광열을 퍼뜨렸다. 홍위병에 자극받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혁명의 대오를 결성하고 지방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탈권(奪權, 권력탈취) 투쟁을 전개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군중조직들이 생겨나선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군대를 투입해서 “혁명적 좌파 군중을 지원하라!” 명령했고, 군대를 통해서 중화기로 무장한 군중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실제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군중을 분열시켜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조장한 마오쩌둥은 성공적으로 정적들을 축출한 후에는 “천하대치(天下大治)”를 내걸고 인민을 탄압했다.
1984년 중공중앙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문혁 10년 동안 “1억 1천 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172만 명이 비자연적으로 사망했고, 13만 5천여 명이 “현행 반혁명”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민간의 무장투쟁으로 23만 7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703만 명이 상해를 입고, 7만여 호의 가정이 초토화됐다. 사회주의 마오쩌둥이 일으킨 분열 정치의 참상이었다.
덩샤오핑, 문혁의 혼란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발란반정(撥亂反正)”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로 선출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새 시대의 의제(議題)로 채택했다. 여기서 “개혁”이란, 중공중앙의 정치체제,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의 기본 제도 및 인민 개개인의 문화·의식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곧 총체적인 변혁에의 요구였다. 덩샤오핑은 성공적인 개혁개방을 위해선 무엇보다 진상 규명, 희생자 복권, 피해 보상이 절실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영도 아래서 1978년 4분기부터 1982년 말까지 수백만 건의 원안(寃案, 억울한 사건)들을 모두 찾아내서 평반(平反, 오류 정정)하는 전국 규모의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이 일어났다 .에서 연원한 “발란반정”이란 성어(成語)는 혼란 국면을 정돈하고 정상 질서를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문혁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덩샤오핑의 의지가 감지된다.
1980년 1월 16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간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강화했다.
“최근 3년,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중앙 및 전국 각지에서는 원죄(冤罪, 억울한 죄) 및 오심(誤審) 사건들이 정정(訂定)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이미 정정되어 복권된 인원이 295만에 달한다. 재판 없이 부당하게 처벌되었다가 명예를 회복한 사람들은 그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이때는 이미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펑전(彭眞, 1902-1997), 시중쉰(習仲勛, 1898-2002), 루딩이(陸定一, 1906-1996), 보이보(薄一波, 1908-2007), 양상쿤(楊尙昆, 1907-1998) 등 문혁 기간 고초를 겪고 지방에 유폐되었던 중공중앙의 영도자들도 모두 사면·복권된 후였다. 오로지 비운(悲運)의 전(前)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만이 아직 복권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달인 1980년 2월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전체회의에서 “류샤오치 동지의 복권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덕분에 “반역자, 배신자, 수정주의자, 반혁명분자”의 오명을 쓴 채 감금 상태에서 의료 방치로 목숨을 잃었던 류샤오치는 죽은 지 11년 만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부활할 수 있었다.
중공중앙의 영도자급 인물 중에서 류샤오치의 명예회복이 가장 늦어졌던 이유는 자명하다. 류샤오치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으로 귀결될 수 없다. 덩샤오핑으로선 류샤오치를 부활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의 무덤을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는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을 다 함께 살릴 수 있는 묘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동시에 살리는 묘책, 마오의 성취 칭송하고 과오에 면죄부
중공중앙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에 걸쳐서 중국현대사에 관한 당의 공식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힌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이하 역사 결의)”를 작성했다. 1980년 3월 19일 덩샤오핑은 이 결의문의 작성 요령에 관해 다음 세 가지 견해를 밝혔다.
1) 마오쩌둥의 역사적 지위를 확립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고 발전시킨다. 2) 건국 이래 30년의 역사에 대해선 실사구시의 분석을 통해 잘잘못을 가리되 간략하게 큰 그림만을 그린다. 3) 지난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과거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덩샤오핑의 제안에 따라 “역사 결의”는 실제로 과거사의 디테일을 파헤치기보다는 굵직굵직한 큰 사건을 짚어가면서 30년간의 성과만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결의문은 1)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한 최초의 7년 (1949-1956), 2) 전면적 사회주의 건설의 10년 (1956-1965), 3) 문혁 10년 (1966-1976), 4) 위대한 역사적 전환기(1977-1981)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결의”에서 중공중앙은 지난 30년의 역사적 성취를 극구 칭송하는 반면, 중공중앙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선 소략히 언급할 뿐이다. 가령 55만여 명을 박해한 반우파(反右派) 운동(1957-1959), 최대 4천 5백만 명을 아사시킨 대약진(大躍進) 운동(1958-1961)의 실정과 착오에 대해서도 반성이나 비판이 거의 없다. 오로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만 마오쩌둥의 책임을 추궁하는데······.
“1965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이어진 ‘문화대혁명’은 당과 국가와 인민이 건국 이래 겪은 가장 엄중한 좌절이자 손실이었다. 이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역사 결의”는 이어서 마오쩌둥이 문혁을 일으킨 동기를 파헤친다. 그 설명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반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이 이미 당, 정부, 군대 및 문화 영역에 침투해서 “자산계급 사령부”를 구축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군중의 총궐기를 통해서만 “주자파(走資派)가 찬탈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그는 문혁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진정한 정치 혁명이며, 영구 지속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결국 “역사 결의”는 문화혁명의 광기와 마오쩌둥 사상을 분리시킴으로써 마오쩌둥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1)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킨 마오쩌둥 동지의 이러한 그릇된 좌경적 논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혁명의 실천을 상호 결합한 마오쩌둥 사상의 궤도를 명백하게 벗어난다. 2) 이러한 그릇된 좌경적 논점은 반드시 마오쩌둥 사상과 철저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3) 마오쩌둥 동지가 중용한 린뱌오(林彪, 1907-1971), 장칭(江靑, 1914-1991) 등은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품고 두 개의 반혁명 집단을 구성한 후,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이용하여, 그를 등에 업고서 나라를 망치고 인민을 구렁텅에 몰아넣는 죄악을 저질렀다.” (번호 필자 추가)
만년 마오의 “좌경적 논점”을 “마오쩌둥 사상”과 구분하고, 문혁의 오류를 린뱌오와 4인방 등에 전가하는 마오쩌둥을 위한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정치적 효력은 자못 컸다. 덩샤오핑은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책임을 묻지만, 마오쩌둥 사상은 그대로 견지한 채로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문혁 10년 간 갈가리 찢긴 인민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서 덩샤오핑은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을 모두 살리는 적당한 미봉책을 택했다. 돌이켜 보면, 덩의 노선은 “법의 지배”에 기초한 “국민 통합”의 치술(治術)이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에 근거한 “인민 통제”의 정술(政術)일 뿐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중국은 시장경제와 마오쩌둥 사상이 어색하게 결합된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