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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 실패, 제방 붕괴에도 살아남은 北 간부들… 예전 같지 않은 김정은 리더십
입력2023.09.22. 오전 3:05 수정2023.09.22. 오전 6:18
[논설실의 뉴스 읽기] 뒤숭숭한 北, 어떤 상황이길래

지난 5월 북한 자강도에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 강도 일당이 화물차에 사제 폭탄을 던져 인명 피해가 났다. 비슷한 시기 황해남도에선 강도가 차량을 향해 던진 수류탄이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오폭 사고가 났다. 평안북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 범죄가 잇따라 북한 보안 부서들에 비상이 걸렸다. 통제와 단속이 엄격한 북에서 강도 무리가 설치는 상황도 생경하지만 폭탄을 범행 도구로 쓰는 범죄가 빈발하는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21일 “평양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도(道)에서 폭탄 범죄가 일어나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북에서 물자 탈취를 노린 사제 폭탄 투척 등 대형화·조직화된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한 배경이다.

관공서 몰려가 항의하는 주민들

강력 범죄 급증에 북한 사회안전성(경찰청 격)은 지난 2월 ‘범죄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안전원들에게 총기 소지를 허용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경범죄에 총기로 과잉 대응하거나 술 취한 상태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발생해 또 다른 문제가 되고 있다”며 “보안서(경찰서)를 노린 총기 탈취 사건까지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6월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하며 관련자들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주민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다. 북한판 MZ세대인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김정은 일가와 당 정책에 대한 거침없는 불평·항의가 이어지고 있다는 게 국정원의 정보위 보고 요지였다. ‘당 정책’이란 핵·미사일 고도화 노선을 뜻한다. 주민들 사이에선 “핵이 밥 먹여 주느냐” “씹어 먹을 수도 없는 미사일만 잔뜩 만든다”는 불만이 팽배한 상태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정황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장마당을 단속하는 안전원·규찰대에 저항하는 일은 다반사고, 시·군 인민위원회(시청·군청 격) 같은 관공서에 몰려가 항의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집단행동은 화폐 개혁(2009년 11월) 직후를 방불케 한다. 구화폐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고 장마당을 폐쇄하는 조치가 전격적으로 취해지자 어렵게 모은 재산을 모두 잃고 살 길이 막막해진 주민들이 죽기 살기로 당국에 저항했다. 민심이 극도로 험악해지자 당시 김정일 정권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 인민반장(동장 격)들을 모아놓고 김영일 내각 총리를 시켜 공개 사과를 하게 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자 20년 넘게 북한 경제를 이끈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남조선 간첩’으로 몰아 총살했다. 아직 북한 당국이 성난 주민들을 달래는 조치를 내놓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불평분자 색출 상무조’를 각 도당(道黨) 산하에 설치하는 등 주민 통제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사고 치고도 멀쩡한 간부들

최근 한 달 사이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인물 중 하나가 김덕훈 내각 총리다. 김덕훈은 지난달 제방 붕괴로 침수 피해가 난 평남 안석 간석지 문제로 김정은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김정은은 김덕훈과 내각에 대해 ‘정치 미숙아’ ‘지적 저능아’ ‘건달뱅이’라고 원색 비난하며 “무맥한(나약한) 태도와 비뚤어진 관점에 단단히 문제가 있다” “무책임한 일본새(일하는 태도)로 국가경제사업을 다 말아먹었다”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관영 매체들은 3000자가 넘는 김정은의 공개 질타를 여과 없이 보도했다. 과거에도 김정은이 분노를 공개 표출한 경우가 있지만 이번엔 표현의 강도나 분량 면에서 ‘역대급’이었다. 김덕훈의 운명은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현재 김덕훈은 평소와 다름없이 공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권 수립 75주년(9월 9일)을 맞아 열린 열병식, 중앙보고대회, 기념공연, 촬영, 외빈 접견 등 관련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며 연설까지 했다. 러시아 방문에 나선 김정은 일행의 환송 행사, 귀국 환영 행사에 모두 등장했다. 북한 매체들은 환영식에 나온 당·정·군 고위 간부들 가운데 김덕훈을 제일 먼저 호명했다. 김덕훈이 김정은의 공개 저격을 당하고도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건성건성 박수 친다는 이유(장성택 당 행정부장)로, 회의 때 잠깐 졸았다는 이유(현영철 인민무력부장)로, 자세가 불량하다는 이유(김용진 내각 부총리) 등으로 무자비하게 총살당한 고위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고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위급 인사는 김덕훈뿐만이 아니다. 북한은 정찰위성 발사 실패 직후인 지난 6월 김정은 주재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발사 실패에 대해 “가장 엄중한 결함”이라며 “위성 발사 준비 사업을 책임진 일꾼들의 무책임성이 신랄하게 비판됐다”고 했다. 비판의 주어는 생략됐지만 노동당 최대 행사인 전원회의에서 나오는 모든 메시지는 김정은의 육성과 같다. 그런 자리에서 공개 비판을 받았다는 건 정치적 사망 선고와 다름없다. 지난달엔 성공을 장담했던 2차 발사까지 실패했다. 정찰위성 발사는 올해 김정은의 역점 사업이다. 두 차례 연속 실패로 수령의 체면을 크게 구겼으니 책임자들이 숙청된대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박태성 노동당 과학교육비서 겸 국가우주과학기술위원장, 장창하 국방과학원장을 비롯한 위성 개발 책임자들은 모두 건재한 상태다. 이들은 김정은의 이번 방러 일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김정은이 무자비한 유혈 숙청을 자제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은 “대체할 인물이 마땅치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집권 이후 워낙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핵심 보직에 갖다 쓸 엘리트 풀 자체가 쪼그라들었다는 얘기다. 이로 인해 북한 관료 사회의 고질적인 보신주의와 복지부동 행태가 더욱 심화하는 현상도 김정은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김정은 집권 초기 숙청 작업에 깊이 관여하며 ‘노동당 저승사자’로 불렸던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마저 숙청 공포에 시달려 사표를 썼다”고 했다. 이유가 뭐가 됐건 김정은이 공개 저격한 사람들이 무탈하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김정은 리더십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핵 개발 노선 놓고 이견 분출

국정원에서 북한 담당 차장(차관)을 두 차례 지낸 한기범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은 “핵 개발 노선 장기화에 따른 사회적 불만이 표출하고 권력층 내 정책 노선을 둘러싼 이견이 대두하는 등 김정은 리더십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퍼지고 있다”며 “주민들의 불평불만이 늘고 간부들의 충성심 확보가 쉽지 않은 형국”이라고 했다. 북한 내부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계기는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이다. ‘핵만 완성하면 조·미 담판을 통해 고강도 제재들을 일거에 풀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20년부턴 코로나 봉쇄까지 겹쳐 자원·자금난이 극심해졌다. 김정은 체제를 떠받치는 당·정·군 엘리트 집단에 대한 보상 시스템이 고장 났음을 의미한다. 당근이 없으니 채찍만 휘두를 순 없는 노릇이다.

실제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의 주요 연설은 핵 개발 노선에 대한 북한 내부의 회의감을 불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 전 차장은 그 대표적 사례로 핵 무력 법제화를 선언한 작년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 연설을 꼽았다. “절대 핵 포기란 없다”는 다짐 자체가 북한 내부 설득용이란 것이다. 작년 말 당중앙위 전원회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2022년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시간이었고 분명코 우리는 전진했다”고 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말투였다. 또 “패배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투쟁해왔음에도 낡은 사상이 경제 일꾼들 속에 고질병처럼 잠복해 있다”고 했다. 영(令)이 잘 서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보위기관들 건재, 체제 장악력 여전

작년 말부터 심각해진 식량난과 치안 불안으로 북한 주민들이 관공서에 몰려가고, 핵 개발 노선에 대한 이견으로 권력 엘리트 집단 내 동요하는 조짐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김정은의 체제 장악력이 약해졌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여전히 국가보위성과 사회안전성과 같은 체제 보위 기구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전직 국정원 고위 관리는 “지방에서의 산발적 소요 사태는 과거에도 간헐적으로 일어나곤 했다”며 “평양이 통제되는 한 김정은 정권의 내구력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의 발언도 눈여겨볼 만하다. 최근 북·러 정상회담을 수행한 그는 지난 17일 러시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밀을 무상 제공할 준비가 돼 있지만 북측이 괜찮다며 거절했다”며 “실제로 북한은 올해 풍년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풍년은 과장이겠지만 5~6월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식량 사정에 다소 숨통이 트인 것으로 보인다.

한두 해 풍작을 맞아도 북한의 만성적 식량난을 해결하긴 어렵다. 대북 소식통은 “작황이 개선돼도 수많은 인민이 굶주리는 게 현실”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걷어찬 건 주민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했다. 앞서 북한은 작년 11월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단됐던 러시아와의 화물열차 운행을 2년여 만에 재개하면서 러시아산 백마를 실어왔다. 주민들을 위한 식량이나 생필품보다 김정은 일가를 위한 사치품을 들여오는 게 우선이었다.

이용수 논설위원 hejsu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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