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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우크라이나전, 가치외교 그리고 인도
중앙선데이
입력 2022.04.09 00:3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2068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에 치명적인 실책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대응 의지를 오판했고, 속전속결로 위성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초기 전략은 실패했다. 러시아 경제에 대한 치명적 제재, 군대의 허약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지구촌의 비난 등 때문에 종전이 돼도,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침공 이전보다 오히려 추락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국제정치에서 가치와 규범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한 국가의 국민이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자결권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가치이자 국제규범이다. 이를 대국이 무력으로 짓밟는 제국주의 행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이것을 용인한다면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을 식민지화했던 것을 용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적 가치가 중요한 방패
정체성과 외교기조 일관성 있어야
북핵 해법의 외교공간 확대 필요
미래 정치 대국 인도 주목해야
그런 의미에서 한국처럼 대국들에 둘러싸여 지정학적으로 힘든 국가에는 가치나 원칙, 국제적 규범이 주변 강대국을 상대하는 데 중요한 방패임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외교 노선도 좀 더 분명하게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보편적 가치, 즉 민주주의, 주권, 인권, 국제규범 등의 준수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헌법 1조가 규정하는 민주국가라는 정체성에 기본을 둔 외교가 되어야 한다. 기본은 거기에 두되 필요한 경우, 즉 가치의 추구와 현실적 이익이 크게 충돌할 때, 얼마만큼의 유연성을 발휘할 것이냐를 고민할 수는 있다. 그것은 다른 국가들도 다들 하고 있는 고민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아예 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과 외교 기조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기에 문제가 되곤 했다. 우리의 가치 기준과 원칙에 따라 최대한 일관성 있는 외교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보다 강대국 정치판에서 생존하기가 훨씬 더 힘들 것 같은 싱가포르가 우리보다 더 단호하게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략적 함의도 따져 보자. 인도태평양에 중점을 두던 미국은 이제 유럽의 러시아와 아시아의 중국을 동시에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전략적 고민이 커졌다. 결국 유럽에서는 나토, 아시아에서는 동맹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면서 동맹들에 더욱 많은 부담을 지울 것이다. 독일의 국방비 지출증가 결정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에 대해서도 한·일 관계 개선과 자주국방 강화에 대한 요청이 커질 것이다. 이런 요청에 부응하면서, 기후변화, 팬데믹, 개발협력 등 국제 공공재 제공에 적극 나서는 글로벌 외교가, 세계 경제력 10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동맹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 문제에 대한 함의도 크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북한 문제에 관해 신경 쓰기가 더욱더 힘들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상황 이전, 작년 한 해 동안에도 미국은 북한 문제에 대해 거의 손 놓고 있었다. 북한은 경제난이 심각해 더욱 조급해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시작했는데, 미국은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북한 문제에 매달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미국과 북한 양측 상황의 미스매치 현상이 뚜렷해진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해 한국이 북한 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상황이 왔다는 말이 된다. 미국에 확장억제 강화를 요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소극적으로 미국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대결 구도에서 북한 문제는 표류하고 2017년의 긴장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미국과 신뢰 구축이 튼튼하게 강화되기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북한 문제를 풀어 갈 외교적 공간도 커질 것이다. 새 정부는 그런 면에서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적 공간을 키우고 활용해서 북한 문제를 풀어 갈 정책적 상상력이 얼마나 있을지가 관건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대외전략에 대한 함의도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 간 경쟁을 심화시켰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다양한 소다자 네트워크를 만들어 중첩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쿼드, 오커스(AUKUS),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 한·미·일 3각 협력 등이 그렇다. 마치 독일통일 이후 1870~80년대 비스마르크의 외교와 비슷하다.
문제는 실존하는 북한의 안보위협 때문에 우리가 한·미 군사동맹에 의존하는 한, 미국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게다가 앞으로 미·중, 미·러 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 기업들이 권위주의 국가들과 무역이나 투자를 하는 경우, 국제정치적 요인 때문에 지불하는 추가비용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중장기적으로 정치적 비용 걱정이 적은 대안적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거대 시장을 가진 민주주의 국가이자 미래의 정치 대국인 인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임기 동안, 현 정부가 하려 했으나 하지 못한 것, 즉 한·인도 관계를 주변 4국 외교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획기적인 업적이 될 것이다. 최초로 우리 자신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세계 10위 경제력에 걸맞은 대국 외교를 시작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